강화조건으로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데려간다. 조선왕조의 명분이 추락한 것에 대한 분노와 수치심, 명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청나라에 복수하겠다는 명분론이 팽배하던 분위기 속에서 결국,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에 의해 북벌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Ⅰ. 개요
오늘의 한국사회는 크게 변화되었고, 또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지난 40여 년 동안 근면한 국민성과 '하면된다'는 노력으로 마침내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우리의 저력을 잘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다각화 경영이라는 미명아래 이루어진 재벌의 지나친 확장과 과다차입을
Ⅰ. 들어가며
병자호란 직후 북벌론은 대청관계에 주체적으로 대처한다는 명분으로 왕의 주도하에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인 경우는 효종대였다. 당시 효종이 북벌론을 국책으로 적극 추진한 이유는 인조반정에 의한 왕위계승에 정통성 결여라는 문제가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왕위계승의 정
정책을 취하면서 조선과 여진이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건주 여진의 누르하치가 서서히 여진족을 규합, 16세기말에 이르러 여진족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명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조공을 바치는 등 명에 대한 순종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여진이 강성해지는 반면 명
주자학 그 자체를 비판하거나 반대하였다기보다는 원전(元典) 그대로의 사상을 이해하고 원용하려는 자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윤휴의 사상이나 특히 경학(經學)사상에 관해서는 많은 논문이 나와 있지만, 본고에서는 윤휴가 제안하고 주장하였던 실천적 정책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