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지배층이 당면했던 문제점은 성리학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하여 정치기반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왕위계승의 정통성 문제로 표면화되었는데 특히 대외문제와 결부시켜 왕위계승의 문제 제기가 심각했던 인조반정과 호란을 전후한 시기의 척화파 ․ 주화파의 대
조선에 대해 강화조건으로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데려간다. 조선왕조의 명분이 추락한 것에 대한 분노와 수치심, 명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청나라에 복수하겠다는 명분론이 팽배하던 분위기 속에서 결국,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에 의해 북벌론이 대두
인조반정으로 서인과 남인이 현실적인 정치세력으로 의미를 가지게 되면서부터이다. 이이의 경세론에 관한 주장은 당대에는 선조에 의해 채용되지 않았으나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의 개혁론이 되어 점진적으로 실천의 대상이 되었다. 김장생은 호서서인의 한 사람으로 이이를 이어 송시열로 이어지는
명분론이 형세론에 비해 강세를 이루었다. 이후 인조 집권 시기에는 명분론은 주전론으로 형세론은 주화론으로 발전되어 그 대립은 더욱 심해지게 된다. 그 후 효종 집권시기에는 북벌론이 크게 대두되었고, 그와 대비되는 북학론도 나타나 미약하게나마 조선 사회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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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1년(1633년)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당시 과거시험관으로 우암의 답안 내용을 격찬했던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곧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 2년 후에 왕자의 사부로 임명되어서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가 30세 되던 해(1636년)에 병자호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