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과 관심을 가져야 한다.
②동정과 사랑을 혼동하지 말라
동정과 사랑을 혼동하는 사람이 있다. 실패자나 약자에게 느껴지는 연민의 정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연민의 정에서 시작하여 후에 진정한 사랑이 싹틀 수도 있지만 내내 연민의 정으로만 사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
연민의 대상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동성애 코드에 가까운 인물은 장생이다. 공길에 대한 장생의 사랑은 누명을 쓴 채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깊은 것이었던 것이다. 자유로웠지만 공길에게만은 자유로울 수 없었던 사내, 장생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극에서처럼 이 영화의 진
연민은 과대하게 상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가족애에서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성적인 것을 넘어서 자기 희생적이고 무한투사 또는 맹목적 투여이다. 어머니의 눈에 자식이란 어머니의 대리만족 이상으로 모든 것을 투여하고, 그 투여된 형상이 그대로 실행에 옮겨 질 것으로 믿는다.
애정 어린 관심이 아니라 차가운 증오심에 가까운 관심이 된다. 그 사람과는 신체적으로 절대 접촉해서는 안 되고, 그래서 그 사람이 어딘가 가게 되면 누구든지 못 볼 걸 봤다는 듯 찡그리며 피해 버린다.
그러나 그런 병에 걸렸을지라도 그들도 분명 사람이다. 그도 분명 사람과의 이야기, 단순히 호
연민 내지 자기온정(self-compassion)을 개발시켜 자기 비난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한편 양육태도에 대한 연구로는 Schaefer(1965)가 부모의 아동에 대한 역할유형을 구분하여 제시한 두개의 차원, 즉 부모와 아동의 정서적 관계를 다루는 애정-적대 차원과 부모가
애정’이라는 문구로 이 책을 소개하고 있다. 일부 공감한다. 책의 주인공 허삼관은 평생을 가족을 위해 피를 팔며 살아온 인물이다. 그가 한평생 그렇게 살다가 노인이 되어 정작 자신을 위해 피를 팔기로 결심했을 때에는 이미 늦음을 알고 굉장히 서글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연민을 느끼기도 했다. 매
작은 웃음과 연민을 만들어낸다. 내가 상상하는 아버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웃으며 즐겁게 달리고 있다. 화자는 사랑이란 어쩌면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화자의 상상속의 아버지가 우스운 것은 아버지에대한 화자의 애정이 담겨 있기 때문은 아닐까....
애정은 어느 소설에서건 빠지지 않는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몇몇 예외를 제외한 분신 같은 주인공들) 모두 생활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사는 듯한 담담하고 담백한 성격인데 유독 요리에는 정성을 쏟는다. 아니 정성을 쏟는 다기 보다는 소홀히 하지 않는 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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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과 동정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짧은 시간이나마 도념을 아들과 동일시 하며 모자간의 정과 비슷한 것도 나누었다. 그러나 친정모는 주지의 말에 동조되며 도념을 불신하게 된다. 불교의 윤회사상과 업보설을 완벽히 내면화한 탓에 도념으로 하여금 죄가 발생한다며 받아들이기를 꺼리기도 한다.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 픽션인 소설 속 인물이 어찌하여 이렇게 가슴이 와 닿고 인간으로써의 동정과 애정이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마,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의 뛰어난 능력일 것이다.
우선, 어떠한 면이 연민을 느꼈는지 살펴보겠다. 천하 절세 미남이고 신분이 높아, 못하는 것이 없고,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