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으로 그 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후부터는 사회주의 계열 운동가들이 운동의 주도권을 잡아나갔다. 이들은 이제까지의 운동이 주로 소년운동․인테리운동에 국한되고 있음을 비판하고, 노농대중을 기반으로 한 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이 운동은 당시 일본 오사카에서 제주도에 보낸 문건인
Ⅰ. 서론
역사가가 아닌 보통 제주주민이 제주 4.3사건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50여 년 동안 이 사건이 주민들간에 회자되어 오고, 의례 등을 통해 다음 세대들에게 전달되어 오면서 사건을 직접 겪지 않은 제주주민들도 나름대로 4.3사건을 정의하고 있을 것이다. 먼저 4.3사건 2세대와 3세대의
사건(제주 4 3항쟁)의 주체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로 본격화된 제주도민중항쟁을 살핌에 있어 소박한 수준이지만 당시의 직업구성을 중심으로 행위주체가 어떻게 조직으로 구성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여기에는 항쟁의 주체들뿐만 아니라 이를 공격하는 진압세력의 조직형태도 추적해 본다. 일본 제
사건을 ‘치안 상황’으로 간주, 4월 5일 제주비상경비사령부(사령관 김정호 경무부 공안국장)를 설치하는 한편, 본토 경찰 1,700명의 제주 파병을 승인하였다. 또한 서청 단원 500명을 증파했다. 그런데 응원경찰 등에 의한 토벌작전은 오히려 민심을 자극, 많은 도민들을 산 속으로 피신시키는 결과를 빚
Ⅰ. 서론
1960년 4ㆍ19혁명은 한국전쟁과 이승만 반공독재체제하에서 도민들이 국가에 대하여 가졌던 공포감, 불만을 한꺼번에 분출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4ㆍ19가 일어나자 10여 년간 입을 굳게 다물었던 제주 4ㆍ3사건 피해유족들은 거리낌 없이 자신들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1960년 5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