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시의 복고적 경향-
이백은 촉의 선배인 진자앙(陳子昻)을 흠모하여 시의 풍격에 있어서 육조의 기려함을 제거하고 복고적인 문학을 계승하려 하였는데 그의 <古風> 59수는 바로 진자앙의 <感遇詩>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古風>시 첫머리 가운데서 “대아의 작품이 오랫동안 지어지지 않으니, 내
당시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드물다.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당시는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당나라 시대의 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당나라 이전의 시
중국에서 시의 역사는 기원전 6세기에
모두 5만여 수에 달하는 당시(唐詩)는 기원전의 주나라부터 남북조시내까지의 1천6백여 년 동안 생산된 시가 보다 양적으로 두세 배가 될 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다양성과 창조성이 그 어느 시대보다 풍부했다. 이렇듯 화려한 당대에 활약했던 이백과 두보야말로 각기 개성과 업적을 남긴 중국의
당시풍(唐詩風)이 시단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그 계기를 마련한 것은 박순(朴淳)이며, 세칭 삼당시인으로 불리는 이달(李達), 백광훈(白光勳), 최경창(崔慶昌) 등이 모두 박순으로부터 당을 배워 송대의 사변적이고 주리적인 시풍에서 벗어나 참신하고 창조적이며 인정세태를 주정적으로 다스리
당시(唐詩)를 애독하였다.」
하지만 당시 기생의 신분은 엄연한 천민이었다. 그들은 당대 지탄과 비난의 대상이기도했지만, 하나의 우상으로 연예인처럼 따라 하고픈 대상이기도 했다. 유독 규제가 느슨했던 기생들은 조선시대 여성 최고의 자유를 누렸기 때문이다. 황진이 역시 명성과 더불어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