冊封, 羈縻, 公主의 降嫁, 君臣․兄弟關係 등 그때 그때 諸國家와 민족의 성쇠를 감안하여 융통성 있는 정책을 취하였던 것이다. 특히, 唐이 北아시아의 遊牧社會를 羈縻體制라는 틀 속에 묶어 놓고 수십 년에 걸쳐 지배했던 것은 중국의 왕조들과 북방의 유목국가들 사이에 오랜 대립의 역사
1. 서론
고문서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삼국시대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왔던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키워드는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의 두 단어이다. 삼국시대부터 19세기 말까지 지속됐던 이러한 관계는 과거의 모든 대외관계를 관통하며 큰 족적을 남겼다.
신라(新羅)가 삼국을 통일하고
훈구세력은 세조의 권력장악에 기여한 공로로 창출된 공신들로, 세조의 집권 자체가 역사적 정당성이 적었으므로 이들 역시 개혁적인 성향은 적었다. 이들은 출신성분이나 경제적 지위도 건국공신들과는 달리 결코 낮지 않았다. 이러한 기반을 가진 이들이었으므로 세조집권 초기의 정책에서는 개혁
◇ 황하 문명과 고대 중국 문명의 특징
세계 4대 문명 중 중국 문명, 즉 황하 문명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 확실한 것은 다른 문명이 -인더스 문명이 인더스 강,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이집트 문명이 나일 강을 낀 것처럼- 보통 큰 강을 끼고 발달한 것에 비해 황하 문명은 양쯔
Ⅰ. 개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에서는 모든 권력이 형식적으로는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국왕은 모든 사람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지식인 관료들의 분열을 막고 국가의 강한 응집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는 국왕에 대한 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