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규모가 큰 전통 한옥이 많았다고 합니다. 인사동의 명칭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 방(坊)이라 함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도의 행정구역 명칭의 하나로 성안의 일정한 구획을 일컫는 것이랍니다. 대사동(大寺洞)에서 가운데 글자인 인(仁)과 사(寺)를 따서 부른 것이라고도 하구요.
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에서 가운데 글자인 인(仁)과 사(寺)를 따서 부른 것이라고 한다. 조선왕조를 건립한 태조 때부터 국가나 왕실에 공을 세운 사람을 공신으로 책록하기 위해서 그 업적을 조사하던 관청인 충훈부가 관훈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도적을 경비하고 법에 금한 사치스런 잔치나
寬仁明敏)”
신라사를 통해 가장 훌륭한 인재들로 꼽을 수 있는 김춘추(602~661)와 김유신(595~673)이 정치군사적 실력자로 입지를 확보해 간 시기가 바로 이 선덕여왕대이다. 김춘추는 폐위된 진지왕(재위 576~579)의 손자였지만 지혜와 화술, 국제 감각까지 갖추어서 당은 물론 일본에도 알려졌다. 그런데
寬仁(관인)하고 明敏(명민)하였으며…', '…그의 先見(선견)이 이러하였다' 김부식 지음, 이병도 옮김,『삼국사기』, http://www.krpia.co.kr, 신라본기 제5, 善德王(선덕왕)
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기이편의 위 일화를 통해 지혜로움을 말하고 있고, 탑상편에는 신인神人의 말을 통해 '지금 그
寬仁坊)이라고 불렸던 큰 구획과 작은 구획을 말하는 대사동(大寺洞)에서 각각 ‘인’자와 ‘사’자를 취해서 지어진 명칭이 바로 오늘의 인사동인 것이다. 여러 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인사동은 대사동에서부터 동명유래가 되는데 댓전골·사동 등의 이름으로도 불려 졌으며 지금의 인사동과 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