貿易)
아편전쟁으로 영국이 해체시키고자 한 것이 바로 광동체제이다. 남경조약 체결 이전에는 중국과 여러 외국간에는 대등한 외교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으로서는 외국과의 관계란 외교도 무역도 아니고 대체로 조공관계(朝貢關係)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 지배계층(士大夫)의 의식 속에서
우리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역사를 배워왔다. 고대사는 물론, 중세 및 근세, 근대 그리고 현대까지의 모든 역사를 포함해서 말이다. 이렇게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가 생각해보아야만 하는 사건들이 많이 존재하게 된다. 중세의 경우, 묘청의 난이라든가 근세의 조선에 있
朝貢貿易)의 관행을 들어 거부
② 공행 무역의 폐지 주장
③ 동인도회사의 무역 독점권 폐지 ⇒ 제한무역체제를 중국시장 전체 개방 압력
④ 중국의 아편 몰수 - 엄금론(嚴禁論)을 주장한 임칙서가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광주에에 파견 → 중국인과 영국인들에게서 아편 몰수, 파기
(2) 전개 (1840 ~
朝貢國)과 같은 대우로 전락했으나, 말엽에 이르자 업무의 확대와 제국의 압력에 따라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이 설치되었고, 곧 이어 1901년에는 외무부로 승격하였다. 말기 몇 년 동안에는 이 밖의 관제개혁도 시행되었으나, 만인(滿人) 중심의 집권주의는 한인(漢人) 관료의 이반을 초래
貿易章程)’에서는 아예 그 서문에 조선이 청의 ‘속방(屬邦)’이라고 밝혀 종속관계를 명문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하여 일본은 물론 미국.영국.독일 등이 함께 항의하였으나 청과 조선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로써 만국공법체제에 따른 국제질서는 다시 흔들렸고 그 뒤 청은 “속국(屬國)의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