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은 유하동(柳河東) 자는 자후(子厚). 하동해(河東解:지금의 산시 성 윈청[運城]) 사람이다. 일찍이 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왕숙문(王叔文)의 혁신단체에 참가했으나, 실패하여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었다. 후에 유주자사(柳州刺史)를 지내 유유주(柳柳州)라고도 한다. 한유(韓愈)와 함께 고
柳宗元(773~819)은 字는 子厚이고 河東(지금의 山西省永濟市) 사람이다. 하급관료 집안 출신인데 재주가 남달라 21세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20대 중반부터 중앙관직에 진출했다. 관료로서의 탁월한 재주로 30대 초반에 검찰어사를 역임하고, 왕숙문의 개혁파에 가담하여 예부원외랑이 되어 활발하게 정치
<생평>
柳宗元(773~819)은 字는 子厚이고 河東(지금의 山西省永濟市) 사람이다. 하급관료 집안 출신인데 재주가 남달라 21세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20대 중반부터 중앙관직에 진출했다. 관료로서의 탁월한 재주로 30대 초반에 검찰어사, 예부원외랑을 역임했으며, 王叔文의 개혁파에 가담하여 활발하게 정
포사자설(捕蛇者說)
1. 유종원(柳宗元) (773 - 819)
중국 중당기(中唐期)의 시인으로 자는 자후(子厚)이고 창안(長安) 출생하였다. 유하동(柳河東)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부르며, 관직에 있을 때 한유(韓愈)유우석(劉禹錫) 등과 친교를 맺었다.
유종원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문장을 잘 쓰기로 명성이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