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대 작가와 시대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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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대 작가와 시대적 배경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명은 유하동(柳河東) 자는 자후(子厚). 하동해(河東解:지금의 산시 성 윈청[運城]) 사람이다. 일찍이 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왕숙문(王叔文)의 혁신단체에 참가했으나, 실패하여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었다. 후에 유주자사(柳州刺史)를 지내 유유주(柳柳州)라고도 한다. 한유(韓愈)와 함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제창하여 거의 1,000년 동안 귀족 출신의 문인들에게 애용된 변려문(騈儷文)에서 작가들을 해방시키려고 했다. 한유와 함께 당송8대가에 속하여 한·유(韓柳)라고 병칭된다. 그러나 철학상으로는 한유와 큰 견해 차이를 보여, 천(天)의 의지유무(意志有無)에 관해 논쟁을 벌였다. 유종원은 천지가 생기기 전에는 오직 원기(元氣)만이 존재했으며, 천지가 나누어진 뒤에도 원기는 천지중에 있다고 생각했다. 원기 위에 천이라는 최상위 개념이 있는 것을 부정하여 천이 상과 벌을 내린다는 천명론에 반대했다. 잡문(雜文)에서 전형적인 사물을 예로 들어 심오한 철리(哲理)를 제시했다. 〈포사자설 捕蛇者說〉·〈종수곽탁타전 種樹郭駝傳〉·〈영주철로보지 永州鐵爐步誌〉·〈삼계 三戒〉·〈부판전 傳〉 등은 모두 정론(政論)과 철리를 예술적인 형상과 융합시킨 것으로, 구상이 참신하며 문체가 생동감 있다. 그의 산수유기(山水遊記)는 널리 알려져 있는데, 특히 경물(景物)의 특징을 묘사하는 데 뛰어났다. 유명한 〈영주팔기 永州八記〉 가운데 〈고무담서소구기 潭西小丘記〉는 돌을, 〈소석담기 小石潭記〉는 담수어를, 〈원가갈기 袁家渴記〉는 초목을 묘사했는데, 서로 다른 각각의 사물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또한 세상에 대한 울분을 자연풍경에 이입하고, 속세와 떨어져 있는 기이한 산수에 마음의 울분을 기탁하여 작품에 반영했다. 시의 내용은 담백하며, 유배생활을 반영한 작품과 경치를 묘사한 소시(小詩)는 매우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그밖에 〈유하동집 柳河東集〉이 있다.
그의 출생과 성장배경을 자세히 알아보면, 대종(代宗) 대력(大曆) 8년(773)에 태어나 헌종(憲宗) 원화(元和) 4년(819)에 사망했다. 자는 자후(子厚)이며, 유주자사(柳州刺史)를 지냈기에 유유주(柳柳州)라 부른다. 원래 하동(河東 : 지금의산서 영제현(山西 永濟縣)) 사람이었으나, 부친이 전란을 피해 오(吳)로 옮겨와 오군(吳郡)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21세 때 시가(詩家)라 불리는 이름 높은 대시인 유우석(劉禹錫)과 함께 진사에 합격했다. 그들 둘은 같은 나이에 함께 공부하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진사에 합격한 후 교서랑(校書郞)남전현위(藍田縣尉)감찰어사(監察御使) 등을 역임하며, 왕숙문(王叔文)의 총애를 받았다. 이 왕숙문은 덕종 말년 번진이 발호하고 환관들이 날뛰는 세태를 보고, 시정을 수습하여 개혁을 감행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얼마 후 덕종(德宗)이 병사하고 황태자 이송(李誦)이 왕위에 오르자, 왕숙문은 태자의 신임을 얻고 있었기에 조정을 개혁하려 하였다.
유종원을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천거하여 기밀을 맡는 일에 참가시키고,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계획하며 이전의 여러가지 폐단을 점차 제거하려했다. 당시 왕숙문과 결사를 맺었던 사람은 경학가(經學家) 육순(陸淳), 사학가(史學家) 여온(呂溫), 대시인 유우석 등인데 모두 유종원과 마찬가지로 정치개혁에 뜻을 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신흥정치세력은 너무 밖으로 드러나서, 곧 많은 수구신료들과 환관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들은 세력을 연합해, 왕숙문이 사욕을 탐하여 도당을 만들었다고 집중 공격했다. 왕숙문을 전폭 신임하던 순종(順宗)은 즉위 전에 목병을 앓았는데 즉위 후 건강이 더 악화되어 8개월 만에 태자 이순(李純)에게 양위했으니 그가 바로 헌종(憲宗)이다. 이로써 왕숙문의 정치개혁은 146일 만에 끝나고, 왕숙문은 피살되고 말았다.
친구들도 죄를 얻어 하루아침에 8명의 사마(司馬)가 좌천되었다. 유종원도 연루되어 소주자사(邵州刺史)로 좌천되었는데, 임지로 가는 도중 더 강등되어 영주사마(永州司馬)로 가게 되었다.
영주(永州)는 지금의 호남(湖南) 영릉현(零陵縣)으로 당시는 매우 황폐한 고장이었다. 유종원은 정치적 실패를 겪은 후 곤궁한 고장에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는 옛 시인 굴원(屈源)의 근심을 떨치노라(離騷)를 본받아, 많은 글을 지어 우울한 심정을 기탁했다. 그리고 학문과 수양에 몰두하며, 많은 산문을 써서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분출했다. 그중 우언(寓言)형식을 빌어 풍자한 소품문는 교묘히 억울한 자신의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영주에서 십 년을 지낸 후 유종원은 다시 광서성(廣西省) 경내의 유주(柳州)로 옮겨갔고, 그의 친구 유우석 역시 파주(播州 : 지금의 귀주성(貴州省) 경내의 준의(遵義))로 옮겼다. 파주의 생활은 유주보다 더 심각하여 중원의 생활에 습관 된 사람은 도저히 적응할 길이 없었다. 노모가 계시니, 파견지를 바꿔달라고 상소를 올려 간청했다. 다행히도 명재상 배도(裴度)가 집권하고 있던 터라, 유우석의 처지를 동정해 광동(廣東)의 연주(連州)로 보내고 유종원은 그냥 유주로 가게 했다.
유주는 비록 황량하고 외진 곳이나 산수와 풍경이 뛰어나 유종원은 시간이 생기면 항상 산수풍경을 감상하고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시문 짓기를 즐거움으로 삼았다. 이때 창작된 대부분의 기행문은 모두 유명한 걸작들로, 단순히 풍경만 묘사한 것이 아니고 깊은 정취의 감개무량함을 기탁하여 정서와 문장의 아름다움이 넘쳐나는(情文亦茂) 경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참신한 풍격은 당대는 물론이고 후세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유종원은 유주에서 4년간 근무하다 병을 얻어 사망했는데, 유주 사람들은 생전의 업적을 기려 사당을 지어 기념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천설(天說)》《비국어(非國語)》《봉건론(封建論)》 꼽을 수 있으며 저서 의 시문집 《유하동집(柳河東集)》(45권) 《외집(外集)》(2권) 《보유(補遺)》(1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