源義仲) 등 각지의 겐지가 연이어 거병하였다. 그리고 남도(南都, 奈良)의 사원세력도 반헤이시(反平氏) 측에 가담하였다. 헤이시의 추격군에 패하여 모치히토왕과 요리마사는 전사하였으나, 요리토모는 관동(關東)지방 호족(豪族)들의 지원을 받아 점차 세력을 늘렸으며, 동년 11월 겐지(源氏)의 연고
源義朝: 1123-1160)의 자손에 의해서이다. 源義朝의 3남으로 죽음을 모면하고 지방에 웅거하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1147-1199)가 동생인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經: 1159-1189) 등과 함께 平氏 타도를 표방하고 1184년에 擧兵하였다. 전란의 와중에 平淸盛는 죽고 그의 외손으로 3살에 임금의 자리에
源義經, 1159 ~ 1189)
미나모토 노 요리토모의 이복동생으로 다이라 일문과의 숱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민심을 얻는다. 그러나 동료의 참언으로 형 요리토모의 질시를 사게 되고 결국 젊은 나이에 자결하게 되는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이다.
무사시보 벤케이(武坊弁慶 ( むさしぼう べんけい) 1
유행하자 점차 『헤이케모노가타리』이외의 이야기도 노래하게 되었는데, 그 중 특히 인기가 있었던 것은 『조루리 주니단소시(淨瑠璃十二段草子)』였다. 이것은 우시와카마루(牛若丸) 헤이안시대 말기와 가마쿠라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 (1159-1189)의 아명
經)과 대 종(大鐘)을 구하였다.
● 세종 014 03/11/16(을해) / 일본 구주총관 원의준이 공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청구하다. ; 일본 구주총관(九州摠管) 원의준(源義俊)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고 대장경(大藏經)을 청구 하였으며, 평만경(平滿景)과 종금(宗金)도 또한 모두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