私撰으로 전환되어갔다. 관찬사서는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점이후 조선총독부 주관 하에 이루어졌다.
2. 조선총독부 中樞院의 사서편찬
병탄 이후 일제의 韓國統治基調는 민족동화정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동화정책의 수행을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요구된 것이 한국사회에 대한 조사연구였다. 한국인
私撰)지도로 1779년 원본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본토와 함께 채색되지 않은 채 경위도선 밖에 그려져 일본 영역 밖의 섬으로 인식하고 있다. 독도가 일본 땅이라면 개정 일본여지노정전도에 함께 그린 울릉도에 대해서는 왜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지 못하는가? 또한 한국의 각종 지도에 쓰시마(對馬島)
私撰)인 『동국사략』은 관찬(官撰)인 『동국통감』과 달리,고려말기 조선왕조 건국과정에 이성계를 도와 혁명을 주도한 개국공신들의 출신과 인격을 비판하고, 그 반대편의 이색, 정몽주, 이숭인 등의 사상과 학문 인품 등을 칭송하고 있음
"약용이 살펴보건대, 해성은 고구려의 사비성으로
私撰地圖)는 이러한 협력 체제를 갖출 수 없어서 관찬지도를 토대로 재편집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 경우 거리 실측은 개인이 할 수 없지만, 편집 기술은 관찬을 능가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정상기 일가나 정후조 일가 그리고 김정호와 같은 우수한 지도제작자가 나오게 된 것이다.
◆ 풍수 지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