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元震)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호서(지금의 충청도 일대)지방에 거주하였고, 인물성동론을 주장한 이간(李柬)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낙하(지금의 서울 일대)지방에서 거주하였기 때문에 그들 간에 전개된 인물성동이론을 그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여 지칭한 것이 이른바 ‘
韓元震은 莫若以明 한 구절은 이편의 관건이 되는 말이라고 지적하고, “도를 마땅히 밝혀야 함을 말한 것이다 [言道之當明].”로 풀이했고, 朴世當은 “천리의 밝음으로 비추어 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莫若照之以天理之明].”는 뜻으로 풀이했다.
“사람의 말은 바람소리가 아니다. 말에는 말하
韓元震, 1682~1751)과 외암 이간(巍巖 李柬, 1677~1727)이 가장 널리 알려진 학자들로서 이 두학자들이 논변을 야기한 주인공이다. 당시 남당은 인성과 물성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 데 반하여 외암은 서로 같다고 주장함으로써 견해의 대립을 보였다. 이들 견해의 대립은 수년 간에 걸친 서론(書論)의 형식으
韓元震) 등에 의해 계속해서 배척받았다. 하지만 남언경(南彦經)이요(李瑤)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 등에 의하여 수용(受容)되어 정제두(鄭齊斗)에 의하여 양명학파가 수립되었다. 그로부터 이종휘(李鍾徽)이광사(李匡師)이충익(李忠翊)정동유(鄭東愈)이건창(李建昌)이건방(李建芳)박은식(朴殷植)정인
군자의 품위 그 자체이다.
조선 유교의 전개과정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특기할 만한 사실은 18세기에 이르러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중심으로 하여 벌어진 격론이다.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간의 대립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것은 주리론과 주기론의 대립적 논쟁의 또 다른 사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