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일원화를 통해 삼정문란을 바로잡고 국가재정을 충실히 하려고 했으며, 보부상 단체인 혜상공국을 폐지하여 상업의 자유로운 발전을 꾀하였으며, 사회면에서는 문벌의 폐지를 통해 정치참여의 기회를 확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갑신정변이 3일만에 끝나고만 원인은 무엇보다도 이를 지지할 만한
갑신정변을 서술한 최초의 통사는 『조선민족해방투쟁사』 조선 역사 편찬 위원회 편, 1949.10
이다. 이 책에서는 갑신정변을 “봉건국가를 근대국가로 건설하려는 최초의 개혁운동”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일본제국주의에 이용되었고 농민과의 연결이 없었던 점을 들어, 그 실패가 필연적이었다고 지적
의 핵심인물들이 독립신문 창간에 관여했다는 사실도 정부 측의 적극적인 협력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이유였다. 또한 갑신정변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을 했던 서재필이 다시 돌아오면서 국내의 신지식인층과 합류하여 본격적인 근대 신문 창간 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본다.
(2) 사회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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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안보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으로 이들 주변 강대국들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한반도를 점령하거나 한반도에 영향력을 확대함으로써 각기 자신들의 국가안보를 굳건하게 하기 위하여 조선에서 경쟁을 하게 되었다. 조선이 주변 강대국들의 분쟁의 표적이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조선
의 계급적 성격과 외압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에 대응하는 형태는 각기 달리 나타났다. 한쪽에서는 농민군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의 변혁을 추구하였고, 한쪽에서는 제도 개혁을 통한 개량적 방법으로 근대적 국가를 형성하려던 세력의 일부가 일본과의 일정한 관련 속에서 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