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파 정부에 의해 계승되는 등 일련의 부르주아 개혁운동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Ⅱ. 갑신정변의 원인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여 1874년경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개화당은 개항 후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여러 가지 자주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다가, 1882년 7월 임오군란을
개화당은 개항 후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여러 가지 자주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다가 1882년 7월 임오군란을 전환점으로 하여 커다란 장애에 부딪히게 되었다. 커다란 장애란 바로 청의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의 심화와 민비수구파와의 대립이다. 청국은 대원군 정권을 붕괴시킨 다음 민비 정
근대화 조약이자 불평등조약 (해안 측량권, 치외법권 허용).
1882
조·미 수호 통상 조약(朝·美 修好 通商 條約)
청의 알선으로 미국과 맺은 조약 (치외법권, 최혜국대우 규정).
1882
임오군란(壬午軍亂)
민씨 정권에 대한 도시 하층민의 불만과 별기군에 대한 차별로 인한 구식군인들의 불만으로 이들
개화파와 점차 사이가 벌어지는 경향을 보여왔고, 급기야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각자 판이한 노선의 행동을 취하였다.
정치적 당파
중요 인물
정치적 특징
급진개화파
(개화당)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 변법적 개화 및 국정 전반에 걸친 대경장 개혁 추구
- 청국의 적극간섭 정
근대화를 말하는 것이다. 보다 직접적,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서구 물질문명의 수용에 의해 근대적 자주독립국가를 이룩하기 위한 혁신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개화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개화당은 조선에 대한 정치․경제․사회적 비판에서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삼일천하(三日天下)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