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 기념비에서는 유길준을 사회개혁가, 정치가, 교육가, 저술가 로 소개함
3)《서유견문》을 비롯한 여러 권의 저서 활동
* 서유견문을 쓰게 된 내력
- 1881 일본 방문 시,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상당히 개화한 일본을 보고난 후 감명을 받아, 견문한 바를 수집하여 후일 국민계몽의
견문을 넓히고 오도록 하였다. 이는 곧바로 한성순보(漢城旬報)의 창간으로 이어지며, 개화사상 보급과 지식의 대중화에 기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서양 철학과 과학의 전파가 한성순보를 낳는 계기를 마련했고, 더불어 이는 독립신문이 성공적으로 창간될 수 있는 토양을 고르고 있었다고 생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서구의 문물 특히, 일본의 선진화된 문물을 보고 배워서 조선의 위기 상황을 서구문명을 통해 타개하려 했다. 혹자에 의하면 김옥균의 사상은 유물론적 사관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당시 조선의 유교체제와는 다른 개혁적 사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견문』 등의 근저에 흐르는 개화사상의 핵심은 바로 근대적 국민 참정권 사상이었다. 이들은 이미 중세적 신분관을 극복하고 친부인권설에 기초하여 국민참정권을 주장함으로서 근대적 국민의식·민족의식 형성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었다. 민권을 신장하고 전제군주권을 제한하기 위한 정치형태로는
손자 박규수(朴珪壽)를 만나 그의 권고로 근대적 학문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 후, 1881년 봄. 조선은 일본의 문명개화를 파악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낸다. 유길준도 수행원으로 발탁되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이 때, 동경에 게이오의숙에 입학함으로서 한국 역사상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