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취대장으로서의 유용성을 점차 잃어 가던 호적대장은 조선전기에 설정했던 호의 모델을 추구하는 양상이 나타난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테면, 19세기 들어 남녀의 연령분포도가 주로 장․노년층을 등재하고 동유층을 누락시킴으로서 다이아몬드형의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19세기 들어 구총
수취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정도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때 유통되는 물품은 주로 봉건 관료나 양반지주 등의 사치나 향락을 위해 쓰이는 물품들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농민들의 농업생산에 필요한 농기구, 면화, 면포, 미곡 등이 주요한 상품으로 등장하여 농민적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
환곡을 작전하여 고가로 취잉한 것이 4,100여 량이었다. 이는 오래 전부터 해오던 관행처럼 여겨지고 있었지만, 불법적인 것이었다. 보다 심한 것은 병고전을 반이 즉 유용한 것이다. 그는 병고전 3,800냥을 작미한 1,066석 10두를 ‘병고구폐미’라 하여 총외로 가분하였으며, 가을에는 매석에 5냥 5전을 거
산청군은 삼한시대에는 변한 땅에 속해 있다가 삼국시대에는 산음현과 궐성군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산음현과 단계현을 합천에 복속시키고 강성현을 군으로 하여 진주에 영속시켜오다가 단계를 합천으로부터 강성에 이속 시켰다.
조선시대에 강성과 단계를 합일하여 단성현으로 고치고, 산음현을
Ⅰ. 머리말
조선 후기, 즉 17-19세기에 이르러 한국사회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면서 중세사회를 지탱하던 구조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사회적인 면에서 신분제의 동요, 신분제와 맞물려 중세사회의 물질적인 토대를 이루었던 경제 구조의 변화, 유학자들의 주자학적 사유방식에 대한 이반, 정치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