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지역 동북계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을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마한으로부터 땅을 할양받은 초기백제는 상대적 열세와 군사적 갈등요인에 대처하기 위해 자체결속역량을 강화시키고 효과적인 정치적 통합에 노력을 기울였다.
신라의 토대인 사로국 단계나 진한 주민에게는 이른 시기부터 남래경험
19세기 말 L.H.모건은 원시사회가 씨족 포족(胞族) 부족 부족동맹으로 발전한다는 학설을 제기하였으며 그 결과 원초적인 국가형태의 기저에 있는 친족 씨족과 같은 혈연집단의 구조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그리하여 사회형태를 혈연적인 구조와 기능에서 성립하는 것과 재산 지역이라는 물적 관계를 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었을 것으로 주정된다.
『후한서 권 85 고구려』
"동이족들은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별종인 까닭에 언어와 법제가 많이 같다고 한다."
『삼국지 권30 고구려』
"동이의 옛 말에 부여의 별종이라 하여 언어와 여러 일들이 부여와 더불어 같다"
『후한서 권85 동옥저』
고조선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관습법인 동시에 사회 교화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 민족 고유이자 최초의 법이었다. 팔조 금법은 그 내용의 일부인 3개 조항만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①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② 다른 사람의 신체에 상해를 입히면 곡물로서 배상한다.
동이전(東夷傳),『후한서』(後漢書)등 중국 문헌에 기록되어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북쪽의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와 남쪽의 마한, 진한, 변한 등의 국가를 형성하였다. 이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부여 , 고구려, 예에는 연중행사로서 일정한 시기를 가리어 노래와 춤으로써 하늘을 섬기는 풍습이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