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져 멸망하고, 북연이 건국되었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고 지금의 경기일대를 장악하였고, 더 내려가 신라를 완전히 압박(중원고구려비)하였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사실 고구려는 당시 주변국들을 모두 제압할 군사력이 되지 못했으
고구려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 고구려는 스스로 중국의 중앙왕조에 대해 종속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뿐 아니라 고구려는 책봉을 받았고 조공을 바쳤으며 인질을 보냈다. 중국의 고대 변방민족이 사용하던 ‘고구려’라는 명칭을 삼한 신라의 계승자인 고려정권이 계승 도용함으로써
이승만과 안창호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김좌진, 안창호, 노백린 등은 군대를 키워 나라힘을 길렀으며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에서 학교가 많이 세워 졌다. 1911년 11월 1일 총독부에서는 조선교육령과 토지조사국을 만들어 착취정책을 써 우리나라의 모든 것을 긁어 갔다.
2. 3.1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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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205호>
소재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
시대
고구려
종류/분류
비석
크기
높이 203cm, 폭 55cm, 두께 33cm
공식 명칭은 ‘충주 고구려비’로 국내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이다.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다듬어 4면에 모두 글자를 새겼다. 1979년 발견 당시부터 비면이 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