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에 의해 개창되었다. 그런데 요동공격은 최영이 주도하였다. 최영과 이성계의 대명관계에 대한 견해 차이가 조선왕조의 성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대외관계를 둘러싼 최영과 이성계의 갈등이 고려왕조의 몰락과 조선왕조의 개창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고려말 공민왕, 우왕대
이성계가 고려 전체에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는 우왕6년(1380)에 하삼도에 침범한 왜구를 토벌한 일이었다. 아군의 수보다 무려 10배 이상 많았던 왜구를 크게 격파했던 이 싸움의 이름은 황산대첩으로써, 당시 이성계의 나이 45세였다. 당시만 해도 이성계는 최영과 함께 고려를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
조선건국의 과정
1. 고려말의 정세
1)내부: 권문세족에 의한 토지겸병으로 백성들의 생활 궁핍과 국가재정의 위기.
2)외부: 홍건적과 왜구의 잦은 침입→이성계와 최영의 성장
2. 이성계의 건국과정
친원파와 반원파의 대립→원의 몰락으로 반원파(공민왕파)의 승리
공민왕파는 변방 세력이었던 이
공민왕 때까지 끈끈한 결속력을 보여줬지만 공민왕이 환관 최만생의 주동하에 피살당한 후 어린 우왕이 즉위하면서 신진사대부 간에 그 뜻을 달리하는 분파적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 분파적 모습이 바로 이색, 정몽주 등을 앞세운 온건개혁파와 이성계, 정도전이 앞장선 급진 개혁 세력입니다. 이들
1. 충선왕, 충목왕대의 개혁정치 및 평가
1.1 충선왕대 정치개혁의 내용
충선왕의 개혁정치는 크게 ①정방혁파, ②용원감축, ③기강정비의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충선왕은 선대왕인 충렬왕에 비해 더 본직적인 개혁을 시도하였다.
먼저, 정방혁파의 경우, 충선왕은 정방을 아예 없애고 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