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著書
《열하일기(熱河日記)》,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熱河日記》
燕巖 朴趾源은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했는데, 그때 랴오둥[遼東]·러허[熱河]·베이징[北
과농소초 (課農小抄)》,《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 《안설 (按說)》 등의 저서를 남겼다. 사후에도 그의 문집과 저서는 간행되지 못하다가 1910년(융희 4년)에 가서야 간행되었다. 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1761년 초, 요양차 북한산에 들어가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이때 삼국지, 수호전을 비롯한
과농소초 (課農小抄)》,《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 《안설 (按說)》 등의 저서를 남겼다. 사후에도 그의 문집과 저서는 간행되지 못하다가 1910년(융희 4년)에 가서야 간행되었다. 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1761년 초, 요양차 북한산에 들어가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이때 삼국지, 수호전을 비롯한
> <호질> 등을 지어 세태를 비평하기도 하였다. 50세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몇몇 관직을 거쳤고, 늘그막에 <과농소초>라는 농업 연구서를 지어 정조에게 바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박제가·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이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으며, 세상을 떠난 뒤에 정경대부라는 벼슬이 내려졌다.
과농소초 課農小抄』·『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안설 按說』 등을 남기게 되었다. 그가 남긴 저술 중에서 특히 『열하일기』와 위의 책들은 그가 추구하던 현실 개혁의 포부를 이론적으로 펼쳐 보인 작업의 하나이다.
특히『열하일기』에서 강조한 것은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청나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