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중봉기’이며, 그 실패의 의미는 기존 운동의 “결정적 자기 한계”를 청산하고 “반제반파쇼 민족해방투쟁”으로 “혁명적인 질적 전환”을 촉구하는 “피의 선언”이라고 주장했다(광주광역시 1997, 235-246). 이 글은 항쟁의 실패를 “통한의 아픔”으로 되새기던 광주지역 학생들의 투박하면
광주민중항쟁의 구조적 요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의 군사쿠데타 이후 자원 배분의 불균형, 지역 발전의 낙후성이라는 구조적 요인이 전라도 지역의 소외를 심화시켰다. 수출주도형 산업화 정책이 농업의 희생을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에 전라도 지역의 불균등 발전은 심각한 것이었다.
1971
광주의 수리적 위치는 극남점이 북위 35˚03´13˝인 남구 승촌동으로 나주군 산포면과의 경계지역이고 극북점은 북위 35˚15´22˝인 북구 우치동 용강부락이다. 또한 득동점은 동경 127˚00´34˝인 북구 충효동 비성굴 동부지역으로 화순군 남면과의 경계지점이며 국서점은 동경 126˚38´35˝인 광산구 양동 석암
광주민중항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미국 잉여농산물에 의한 한국 농업의 몰락, 산업적 대책 없이 농업에 전업하고 있는 호남지방의 경제적 몰락, 지역에 있어 경제적 소외\"를 기초로 하여, 구체적인 정치적 계기로서 \"강력한 재야세력의 전라남도 출신에 의한 헤게모니 장악과 역사에서 그 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