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빠져나가는 행렬과 거리의 청소차량, 신호등을 다시 세워놓는 (행사를 위해 신호등까지 뽑아냈었다!) 인부들의 몸짓이 빨라지고 찻길을 점령하는 해방감에 맛보기 위해 마지막까지 거리 가운데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어대는 관광객들이 뒤섞여 짧지만 화려한 축제의 끝을 장식한다.
집합체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설정해야 했던 것으로 문제는 19세기의 기념행사들 대체로 “민족을 위한” 것이었지만, “민족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기념행위는 그것이 없다면 일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집단적 기억을 안정화시키려는 계산된 전략인 것이다.
크즐오르다)에 많이 밀집해 있었으며 20세기 초 타종족이 들어오면서 땅을 잃은 카작인들은
북동쪽인 몽골, 중국 인접지역으로 이동하였다.
- 해외의 카작인 : 해외에 거주하는 카작인들은 주로 구소련에 속했던 인근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중국, 몽골, 아프카니스탄 지역에 분포하며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발생해온 각종 민족분쟁들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이것이 당장에는 우리 나라와 관련이 없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에 사태의 심각성을 간과할 측면이 크다. 그러나 세계화의 진행으로 이러한 문제들은 더 이상 남의 일이라고만 볼 수 없다. 극단적인 예로 최첨단 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