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내부)와 元帥府(원수부)는 이들의 정치적 성장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궁내부는 갑오개혁 당시 개화파가 군주권 제한을 위해 설치하였으나, 대한제국 성립이후에는 오히려 의정부를 압도할 만큼 방대한 기구로 성장하면서 강화된 황제권의 실현기구가 되고 있었다.
1880년대부터 東道西器的 개화
1. 들어가는 말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는 말을 할 때, 그 기간은 1897년(광무 원년)에서 1904(광무 8년)까지를 뜻한다. 갑오개혁이 좌절되고 대한제국을 이끌 신정권이 수립되는 1896년(건양 원년) 2월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부터 1904년 2월의 러일전쟁으로 일제가 우리나라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게
갑오개혁은 청일전쟁으로 동아시아에 있어서 중국 중심의 세계가 최종적으로 붕괴되는 가운데 사회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던 광범한 제도 변혁이었다. 재정제도의 변화에 국한하더라도 대동법 이후 그 형식을 유지하고 있던 공납제도가 최종적으로 폐지되었으며, 궁내부가 창설되고 왕실재산의 관리
궁내부의 사무관으로 4년, 이왕직에서 10년 일을 하였다. 여기서 ‘이왕직’은 대한제국 시절 황실사람들을 관장하던 궁내부가 1910년 ‘한일합방조약’으로 인해 이왕직으로 변경된 것이다. 약 15년간의 조선황실 궁내부의 일본인 관리로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완성하였으며, 저자는 독자에게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