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은 청일전쟁으로 동아시아에 있어서 중국 중심의 세계가 최종적으로 붕괴되는 가운데 사회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던 광범한 제도 변혁이었다. 재정제도의 변화에 국한하더라도 대동법 이후 그 형식을 유지하고 있던 공납제도가 최종적으로 폐지되었으며, 궁내부가 창설되고 왕실재산의 관리
근대화의 중요한 기점의 하나로 말해지기도 하는 갑오개혁의 직접적 배경은, 안으로는 갑오농민군의 개혁 요구에 있었고, 밖으로는 일본의 이른바 내정개혁 강요에 있었다.
제1차 김홍집 내각, 제2차 박영효 내각, 제 3차 을미개혁으로 총 3차에 걸친 개혁이었다. 갑오개혁은 고위 관료로부터 시작된
청일전쟁의 시작이었다.
또한 일본은 7월 27일 개혁추진기구로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였다. 군국기무처는 일종의 비상 개혁추진 기구였다. 여기에는 대원군 계열, 동도서기(東道西器) 계열, 친일개화 계열 등 다양한 정파가 참여하였다. 이 중 어윤중(魚允中)으로 대표되는 동도서기 계열이 1894년 11월 제
운영상의 모순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국가를 근대국가 체제로 전환시켜나려는 것이므로 ‘근대개혁’이라는 개념을 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80년대 후반 이후 ‘갑오개혁(甲午改革)’이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으므로 갑오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문호개방과 대외통상의 필요성은 이미 북학파 실학자 인 박제가에 의해 제기된 바 있었다.
또 개항전에도 김정희(金正喜), 박규수, 오경석 등 일부 선각자들은 청 의 양무운동과 양무론자들의 저술을 통하여 세계정세의 대강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식견을 일부 청년들에게 전파하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