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의 폭력적인 진압이 반복되면서 수많은 사상자들을 발생하게 해 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그만큼 치열하게 저항함으로써 민중역량의 진정한 실체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민중들의 고조된 열기만큼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지도와 통제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 민중운동이 좌익세력
세력을 구축한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를 우리들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던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있던 시기, 상당수 다른 나라들도 강대국의 지배하에 놓여있었다. 이 중 무장 투쟁을 통해 성공적으로 독립한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발발과 기원1>> 1996. “LBS 다큐멘터리 김일성 참모들이 밝힌 6.25비사‘. 281쪽
후에 박헌영은 국민을 속여 전쟁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김일성에 의해 처형되게 된다.
④ 이승만의 책임 → 주한미군의 철수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승만은 일제의 식민통치로 부터 벗어난 해방공간에 미군정
위원회나 임시정부등의 정치세력은 철저하게 무시당하였다. 결국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불완전한 해방, 미완의 독립으로 볼 수 있다.
2. 1940년대 우리 민족의 정치지형
우선 김구로 대표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승만, 한국 민주당, 박헌영이 대표주자인 국내 공산주의 세력들, 김일성으로 대표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남쪽에는 미군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이승만이 집권함으로써, 38선 이남에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수립 이후에도 해방 이후의 혼란정국에 대한 재정비가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