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왕당파와 연줄이 있는 파울리와 균열이 생겨 일가족과 함께 마르세유로 도피행에 가까운 이주를 하였다.
나폴레옹은 그 후 툴롱 포병 연대를 맡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툴롱에서 영국군을 무찌르게 되고, 대위에서 영관급을 거치지 않고 곧장 장군이 되었다. 그 이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로 원
유럽의 반동적 제후세력 -특히 독일 연방-과 연계하여 반혁명 전쟁을 수행하여 나갔다. 혁명군의 유능한 장교 나폴레옹은 대불동맹의 연합국 군대를 격파시키는 연승 가도에 올랐다.(오스트리아. 프러시아, 피에몽, 폴란드와 벨기에 등에서). 당시 혁명군의 중심은 총동원령과 군 통합방침에 따라 애국
유럽질서를 주도하려는 속내를 가지고 공동의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만큼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닌 전 유럽적인 문제였고 이슈였다. 빈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중심 기구에는 1815년에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주장한 신성 동맹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영국이 맺은 4국 동
유럽의 사회 분위기가 극에 치달았다. 결국 유럽 각 나라의 군대들이 경쟁적으로 전쟁을 시작하게 된, 제 1차 세계 대전의 불씨가 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제 1차 세계 대전은 1917년 4월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그리고 이탈리아 연합군에 맞서 카포레토에서 이
프랑스 제 1 제정의 황제로서 주변국을 침공하여 한때 제패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를 당했고 유럽의 열강들은 유럽의 질서를 프랑스 대혁명 이전으로 돌리자는데 뜻을 함께 했다. 이런 국제질서를 빈체제라 한다.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4국동맹을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