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조직 등을 통해서 북한의 공격을 예측할 수 있었다. 당시 G2 보고서에 따르면 만주에서 조선인이 훈련된 공산주의자로써 북한으로 입국하고 있었다. 북한의 배후에는 러시아 최고 사령부가 있다. 등의 정보가 이미 미국에 흘러들어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전쟁에 대한 미국의 위험의식은 없었다.
북진계획을 경계함과 동시에 대응병력을 지원하고, 경제와 국내 체제를 안정시키는 것을 당면과제로 보았으며, 6월에 동경에서 있었던 회담이나 6월 18일날 있었던 덜레스의 국내 연설 또한 한국전쟁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미국이 북한의 공격을 예측했냐
한미공모설
이승만의 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이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으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한 바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시키면 이승만이 무력
공격을 공공연히 주장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이와 같은 행위를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11일 맥아더 장군을 모든 직위에서 전격 해임하고 리지웨이 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UN군 측과 공산군 측은 전쟁의 제한에 관한 묵시적인
남북 공동성명이 성사되기 전으로 남북한 사이에 어떠한 공식적인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시기는 제1공화국시기(1953~1960), 제2공화국시기(1960~1961), 제3공화국시기(1961~1971)의 세 시기로 세분화할 수 있다. 이정복. 『한국 정치의 분석과 이해』, 서울 :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71쪽
제1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