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家) 중 당대(唐代)의 두 명문(名文) 대가에 한유(韓愈 : 字는 '退之') 와 유종원(柳宗元 : 字는 '子厚')이 있었다.
이들은 함께 고문 부흥(古文復興)운동을 제창한 문우(文友)로서 세인으로부터 '한유(韓柳)'라 불릴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당나라 11대 황제인 헌종(憲宗:805-820)때 유주 자사(柳州刺史)
사신을 보내 칭기즈칸의 조서(詔書)를 전하고 정식으로 수호(修好)를 청하였는데 이것이 몽골과의 정식 국교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몽골은 거란의 토멸이 고려에 큰 은혜를 베푼 양 해마다 상례로 과중한 공물(貢物)을 받아갔으며, 1225년에는 공물을 요구하러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던 몽골의 사신이
사대가의 마지막 두 사람 이식과 장유가 마련했다.
이식과 장유는 외교활동이나 이념 수립의 과업의 과제에는 관여하지 않고 문학 그 자체를 한층 더 존중하며 산문도 시에 못지않은 예술품일 수 있게 했다. 그래서 이룩된 작품은 현실의 문제의식을 되도록 배제하고 고답적인 취향을 구축하는 폐단
사람들에게 들려주던 형식의 연예이다.
소설은 가창보다도 강설에 중점을 두어 고사를 이야기한 것으로 그 대본인 화본은 본격적 백화(白話)소설로 전해지게 된다.
가무희로는 전답 대곡 곡파, 골계희로는 잡극이 있었다. 잡극은 남송 때 가무희와 강창의 영향을 받아 연극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