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방법을 구상하고 있었다. 결국 서장옥과 전봉준 등 남접 세력들은 사회변혁을 위해 동학교단 상층부를 움직이는 것에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 남접 또는 전라도 고부라는 한 고을의 농민무장봉기로 그 방향을 바꾸어 추진하였던 것이다.
1893년 고부는 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수탈 그리고 전운사 조
항일독립운동
1. 독립 운동 기지의 건설
ⅰ) 장소 : 만주, 연해주 (※3대 독립 운동 기지 : 삼원보, 한흥동, 신한촌)
ⅱ) 선구 단체 : 신민회
ⅲ) 활동목표 : a. 경제적 토대 마련 b. 민족교육의 실시 c. 독립군 양성
ⅳ) 대한 광복군 정부의 수립 :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수립,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 수탈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에 민중은 심화되는 사회경제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군현단위에서 국지적이고 일회적인 형태의 농민항쟁을 계속 벌였다. 이 같은 농민항쟁을 전국적으로 통합하는 데는 동학(東學)의 포교조직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동학은 봉건적 신분질서를 부정하고, 반침략적
갑오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여러 가지 명칭이 제시되고 있다. 대사건에 대한 저마다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성격규정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이름을 내놓고 명명의 정당성과 타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지난 90년 6월에는 명명 문제만을 놓고 학계의 대규모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으
전쟁으로 인한 1842년의 난징조약, 애로호 사건으로 인한 1858년의 텐진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고 이후 열강의 무력에 굴복하여 마침내 베이징조약을 체결한다. 이 같은 소식으로 미루어 최제우는 민족적 위기에 대한 자신의 위기의식을 ‘순망치한(脣亡齒寒)’에 빗대어 ‘보국안민의 계책’으로 동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