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로 변질되고 원래 세도정치란 ‘정치는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사림(士林)의 통치이념에서 나온 이상적인 정치 도의를 의미하였으나, 척신(戚臣) 또는 총신(寵臣)이 강력한 권세를 잡고 전권(專權)을 휘두르는 부정적 정치형태인 홍국영(洪國榮) 이후의 조선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독주를 막으려는 생각에서였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청의 이른 바 '이이제이'정책이다.
결국 세도정치와 어영부영한 정책수행으로 개화파도, 동학농민군도 모두 명성황
후와 민씨 일족 타도를 외쳤다. 어느 쪽의 지지도 받지 못한 명성황후는 외세에
의지 했
고종즉위), 2년 뒤에는 驪興 민씨를 며느리로 맞이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가 추천한 민치록의 딸-민아영은 8살에 부모를 여의고 외롭게 자라 대원군이 가장 경계하는 세도정치의 발호를 예방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왕비로 간택된 16살의 민아영은 이로써 역사의
황후는 강력한 근왕(勤王)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녀의 친인척들 중 개화사상에 눈뜬 자들을 중용하여 결국 자주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기에 까지 이른다. 이후에 급진적 개화와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이의 정치노선에서 조선사회를 이끌어가던 황후는 1895년 일본인 자객들에 의해 시해(弑害)된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 대원군이 감당하기 어려운 적수라고 외교관들은 그녀를 칭찬했다. 특히 서양 여성들이 그녀의 매력과 친절에 끌렸다. 그들에게 비친 명성황후는 폭력과 음모에 겁이 많은 고종을 돕다 자기 생명마저 잃어야 했던 비운의 왕비로 보였다.
1884년 서울에 온 영국의 전권대사인 아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