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따라 중국은 귀화을 바라는 포로는 정전과 동시 인도, 나머지는 중립국에 인도하자는 양보된 안을 전달했다. 이것은 미국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중국의 안이 나오기 전 미국은 원폭의 사용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중국의 안에 미국의 동의하여 부상포로 교환협정이 조인되었다.
정전을 요구하던 미국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하지만 강경한 미국의 입장은 회담을 통해 상당부분 완화되었는데 아이젠하워는 안전보장을 약속하는 방향으로 향후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승만도 아이젠하워의 계획에 정전협정이 결코 한반도 국민에게 불이익을 미치지 않는한 수용하
미국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2월 22일 클라크의 부상포로에 대한 즉시교환 제의였다. 중국은 먼저 김일성과 펑떠화이에게 이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협의한 이후 30일에 제안을 받아들이는 성명을 발표한다. 귀한을 바라는 포로는 정전과 동시에 인도
포로는 스웨덴, 스위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인도 5개국으로 구성되는 송환위원회로 인도하고, 그 사이에 쌍방의 대표가 포로와 접촉, 의사를 확인하고, 90일 후 면접을 끝내 120일 후에 석방한다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말한 것도 없이 미국의 양보로서 중국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이후정전회담은 무기한 중단되고 있었다. 저우언라이 수상의 포로인도에 관한 새로운 제안은 정전회담을 재개시키고 타협에 이르게 만든다. 중국, 소련 그리고 미국이 타협점을 찾지 못하였던 회담에서 중국이 입장을 바꾸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그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 트루먼에서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