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는 3당 聯立內閣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1935년 11월 이래 한국국민당만으로 유지되던 것이 3당 연립내각을 이루어 세력 기반이 확충되면서 새로운 면모를 갖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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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의 역사는 1
광복군이 창설된 시기는 일제가 전쟁을 확대하고 있던 때였다. 1937년 중국대륙을 침략한 일제는 동남아시아 일대로 전선을 확대시켜 갔고, 1941년 12월에는 미국의 해군기지인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였다. 중일전쟁에 이은 미일간의 태평양전쟁 발발은 한국독립운동에 유리한 정
정부를 세워야 세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리하여 민족의 지도자 수십 명이 국제 도시인 중국 상하이로 모여들어 임시정부를 세우기로 약속하였다. 이에 지사들 중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등의 제의에 따라 프랑스 사람이 살고 있는 상하이 보창로에 임시독립 사무소를 설치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과정
3·1운동이 독립을 선언한 운동이었던 만큼 그 결과로 정부 수립이 추진되었음은 물론이다. 정부 수립운동은 세 지역에서 추진되었으며 맨 먼저 추진된 곳은 노령의 블라디보스톡이었다. 그 곳 교포사회를 바탕으로 이미 성립되어 있었던 한족중앙총회(韓族中央總會)가
임시정부의 과제였고 존립의 생명이기도 했다. 국민적 기반을 상실하면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1919년의 임시정부 수립 이후 1945년 임시정부의 환국까지의 업적에서 1932년 윤봉길 의거를 특별히 손꼽는 이유도 그때 국민적 기반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의 업적은 광복군을 설립하여 독립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