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 『독립신문』에 나타난 근대국가의 욕망
근대 계몽기라 불리는 1894년에서 1910년까지 우리에게 유입된 근대적개념들은 주로 신문과 잡지 등 초창기 언론에 의해 소개되고 전파되었다. 근대의 여러 표상체계들이 신문과 잡지를 통해 형성되고 내면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념이 결합하여 자유무역과 보호주의를 위한 토대를 마련해 주었으며 정보의 대량생산(신문, 잡지, 책)과 대량교통체계(증기기관, 자동차)는 세계 전역에 새로운 사상을 빠르게 확산시켰다. 그러나 민주적 이상에도 불구하고 20새기까지 대부분의 나라에서 보편적 참정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근대화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해 준다. 정부에서도 신학문(新學問)을 가르치기 위해 통역관 양성소인 동문학(同文學)과 육영공원, 학부아문 등을 설립하고 운영을 담당하였다. 근대교육에 대한 이러한 열의는 곧 지식에 대한 열망으로 커져갔으며, 독립신문은 민중
최초의 사회계약이 이루어진 시기로 언급하기도 했다. ibid., p. 18
저널리즘이란 개념이 한반도에 침투한 시기가 바로 개화기였으며, 신문이라는 새로운 미디어는 소통의 패러다임을 상당부분 바꿔놓았다.
새로운 소통의 장을 열겠다는『독립신문』의 포부는 창간호에 실린 논설에서도 잘 드러난다.
근대화된 민족을 말한 것이다. 1918년 귀국한 후 북경으로 가서 조선청년독립단 조직에 가담했고 이후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흥사단에 가입했다. 그리고 이 때 개인적으로 이혼의 아픔을 겪은 후, 1921년 귀국해 국내에 머물며 「허생전」, 「재생」, 「마의 태자」, 「단종애사」, 「이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