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군 지도부는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있는 농민군의 역량을 결집하기위해 이 문제를 일차적으로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삼정문란의 책임을 이전의 민란단계에서는 각 군현단위의 수령, 이서층에 돌리고 있었던데 반해, 이제 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은 동학군 통문에서 성명
전쟁 결과 많은 권익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태평천국 진압에 참가하게되어 청왕조에 대한 군사원조 외에도 공동으로 군대를 편성하여 직접 태평천국에 맞서 대항하였다. 내외 양면의 적을 맞아 궁지에 빠진 태평천국은 드디어 1864년 6월 1일 천왕 홍수전의 병사와 7월 19일 천경함락으로 거의 그 막을 내
성격이 이원적으로 진행되어 갔으며, 이들은 교조신원운동과정을 통해 서로 결합되면서 동학 조직 내에서 이른바 남접이라 일컬어지는 사회변혁의 주체세력을 형성해갔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제 1차 농민전쟁이 어떻게 전개되어갔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전쟁의 시작
사회변혁의 주체세력
대한 정치․경제․사회적 비판에서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난 이 사건에 대해 학계의 평가는 긍정과 부정으로 나뉘어 있다. 이 글에서는 개화당의 형성과 성격, 그리고 갑신정변에 대하여 알아보고 개화당과 갑신정변에 대한 학계의 평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운동의 흐름을 살펴보고 비교해보는 것은 매우 의의 있을 것이다. 19세기 하반기에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두 차례의 대규모 농민혁명이 발생하였었는데, 바로 중국의 태평천국 농민운동과 조선의 동학농민혁명이었다. 이 두 농민운동은 시차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 성격의 유사점이 상당수 발견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