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의 정책은 시대가 요구한 자연스런 따름이라고 본다. 이미 거대해진 로마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여러 곳의 분란을 막고 주적(主敵)을 한정지어야 했다. 최고 결정권자는 황제 하나인데 반하여 처리해야 할 지역은 광대하며, 더구나 순서대로 쳐들어오는 것이 아닌 동시 다발적으로
대한 부를 차지하게 된 카이사르는 정치적 ․경제적 실력을 강화하게 되었다. 특히, 한 도시국가인 로마에 그치지 않고 시야를 세계로 넓힘과 동시에 군사독재적인 방향을 취하는 기반을 형성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유럽의 내륙부가 처음으로 그리스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어 서유럽 문화
로마인이야기"(한길사 刊)는 2000년전의 역사 상황을 오늘 우리의 눈 앞에 재현시키고 있다. 제4권과 5권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난세와 인물'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한다. 부르크하르트는 '세계사에 관한 고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대한 인물의 존재는 세계사의 수수께끼이다. 역사는 이따금
이야기가 어중간한 시점에서 열린 결말로 끝이 나 버린 것이다. 이 책에는 작가가 뿌려놓은 떡밥들이 많이 존재한다. 장운이 돌아온 누이를 맞이하는 장면도 빠져있고 석공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그가 성공한 석공이 되는 묘사도 없다. 그리고 과연 장운과 난이는 이어졌을지? 오복이와 덕이는 잘
카이사르의 정책은 원로원파의 생각과 대립되는 것이었으며, 또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모부인 마리우스가 군제도 개혁을 통해 실업자 문제를 일부분 해소하고 평민들의 지지를 얻어 민중파의 수장에 오르면서 그의 가문은 민중파로 분류되었다. 카이사르의 가문에 대한 민중파로의 분류는 당시 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