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의 아명은 짱서우(樟壽)였고 자(字)는 위샨(豫山)이라 했다가 후에 위차이(豫才)로 바꾸었다. 본명은 쪼우수런(周樹人)이며 루쉰(魯迅)은 1918년 북경의 『신청년(新靑年)』에 첫 번째 백화(白話)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할 때 쓴 필명이다. 이후의 주요 작품도 같은 이름으로 출간했기에
현실 인식, 자기기만의 태도, 강자에게 굴종하고 약자에게 으스대며
고통을 전가하는 노예근성 등을 통칭
- 루쉰은 신해혁명(1911)이 전 국민적 혁명으로 발전되지 못한 이유를 중국 국민들 속에 있는 바로 이 아큐 정신에서 찾고자 했으며, 또한 작품을 통하여 그는 혁명에서의 농민들의
중국인의 정치철학, 생활철학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었다. 《신청년》에 실린 후스의 〈문학개략에 대한 소견 文學改良芻議〉은 종래 지식인의 전통적인 필기 문체였던 문언(文言)을 폐기하고 구두어인 백화(白話)를 쓸 것을 주장하였고, 천뚜슈의 〈문학혁명론 文學革命論〉은 신문학이 고전문학의
단기서 정부의 탄압(체포령)을 피해 북경을 탈출하여 교직을 광동 중산대학으로 옮겼다. 1927년 4월 국공 분열 후 다시 국민당의 탄압이 시작되자 불안한 사회정세를 피해 상해조게에 숨어서 운동을 계속했다. 1931년 여름에는 뉴욕에서 열린 노동자문화 연합대회의 중국측 명예주석으로 추대되었다.
혁명가로서 평가하고 그의 업적을 높이 기리고 있다.
노신은 자신의 소설을 통하여 그 당시 혼란스러웠던 중국의 모습을 표현하고 그를 통한 반성과 자각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것은 노신의 문학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도 「광인일기」와 「아Q정전」이 대표적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