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였다. 그러나 르네상스 건축과 예술에 심취한 교황의 눈에 루터는 인간과 예술의 위대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음울한 독일 민족의 일개 수도사일 뿐이었다. 그의 종교개혁 운동은 그 이전의 개혁운동과 마찬가지로 공연히 요란만 떨다 소멸해버릴 작은 ‘소란’으로 여겨졌다.
루터가 종교개혁
루터의 종교개혁은 제후와 귀족들의 보호와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그의 정치윤리적 권고는 봉건주의적 질서를 뒷받침해 주는 보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칼빈은 종교적 박해를 피하여 모여들었던 인문주의자들, 자유 종교 사상가들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력에 의하여 비교적 거의 위협을 받
루터였다. 그러나 르네상스 건축과 예술에 심취한 교황의 눈에 루터는 인간과 예술의 위대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음울한 독일 민족의 일개 수도사일 뿐이었다. 그의 종교개혁 운동은 그 이전의 개혁운동과 마찬가지로 공연히 요란만 떨다 소멸해버릴 작은 ‘소란’으로 여겨졌다.
루터가 종교개혁
루터, 츠빙글리, 칼뱅을 통해 타오르게 된다. 본 보고서에서는 종교개혁 주창자로서 세 사람의 사상과 이론을 비교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각 주창자들의 사상을 국가관과 종교관의 두 가지로 나누어보고, 사상을 소개하기에 앞서 그 사상의 배경이 되는 요소들에 대해 살펴보는 방식
제 1 장. 들어가는 말
교회에 대한 고백은 사도 신조의 중요한 조항 중의 하나였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고백이 있은 다음에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라는 말로 고백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교리를 적용하는 교리(구원론)는 자연스럽게 교회론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