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을 잡자 무신들사이에서는 불안한 분위기가 확산되어 경대승을 따돌렸다. 그러나 경대승은 용사 100명을 모집하여 도방이라는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였지만 발병하여 죽었다. 그러자 이의민이 정권을 잡더니 결국 최충헌의 등장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2. 무신난의 배경과 원인
1) 귀족사회의 동
, 여진 정벌을 총지휘한 윤관, 묘청의 반란을 평정한 김부식 등은 모두 문관이었다. 지방의 수령도 과거에 합격한 문관 출신이어야 임명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이른바 노상상견례라는 규정이 있다. 문관과 무관이 길에서 만나면 문관은 자기보다 한 등급 높은 무관과 동등한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무신난 발생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귀족제도의 커다란 모순은 귀족세력의 대두가 귀족 상호간의 분쟁을 야기케 하였다. 귀족에게는 자동적으로 정권과 경제력 및 사회적 특권이 수반되었으므로 이를 놓고 귀족 사이에 치열한 자기항쟁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정변이었다는 점이다. 그럼 무신의 난과 5․16군사정변에 대해 발생배경 및 과정을 알아보고 이 두 정변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분석해 보겠다.
Ⅱ. 본론
◇ 무신의 난
12세기 들어 지배층 사이의 갈등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으로 결국 폭발하고 만다. 심한 정쟁 후에도 역시나 문벌 귀족의 정
전통적인 문벌귀족과 지방출신 신진관료세력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절정을 이룬 시기가 바로 의종의 부왕인 인종이 재위한 때였다. 고려 초기이래 고려사회를 주도해 오던 귀족세력 내부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