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란은 의종의 보현원(普賢院) 행차 도중에 일어났다. 기거주(起居注) 한뢰(韓賴)가 대장군(大將軍) 이소응(李紹膺)의 뺨을 때린 것이 난의 발단이었다. 문반 5품인 기거주가 무반 3품인 대장군을 모욕한데 대해 정중부 등이 크게 격분했고, 드디어는 다수의 문신들을 살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귀족사회의 모순이 결국 무신난 발생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귀족제도의 커다란 모순은 귀족세력의 대두가 귀족 상호간의 분쟁을 야기케 하였다. 귀족에게는 자동적으로 정권과 경제력 및 사회적 특권이 수반되었으므로 이를 놓고 귀족 사이에 치열한 자기항쟁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자
귀족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과거와 음서, 공음전 등 관직과 경제력까지 독점하였고, 왕실과 외척관계로 엮이면서 정권 장악은 더욱 견고해졌는데 과거 출신관리와의 갈등, 왕의 측근세력과의 대립으로 붕괴되었다. 대표적으로 이자의의 난(1095), 이자겸의 난(1126), 묘청의 서경천도운동(1135)이 그 예이다
1. 중세의 세계
10세기 초 중국에서는 당이 멸망하고 5대 10국이 흥망하는 가운데 사대부라는 새로운 지배층이 성장하였다. 5대의 혼란을 수습한 송은 중앙 집권적인 황제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과거 제도를 강화하여 문반 관료 중심의 문치주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송은 국방력의 약화로 북방
무신정권의 시초
정중부(鄭仲夫)의 난은 고려 관료사회의 무반에 대한 홀대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란 사건으로 명종대 이후 1백 년간 지속되는 무신정권의 시초가 된다.
흔히 무신란을 일으킨 장본인은 정중부(鄭仲夫)로 이해되어 왔다.《高麗史》에 무신란이 정중부의 난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