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유신 말기 한․미 관계가 불편한 상태였듯이 일본과의 관계 역시 매끄럽지 못했다. 그것은 김대중납치사건과 문세광 사건때문이었다.
문세광 사건과 관련, 일본 정부는 법률적 내지 도의적 책임을 솔직히 인정했다. 그리하여
9월19일 진사특사로 시나에쓰사부로자민당 부총재가 다나
문세광을 포함, 58명이 처형됬다고 한다.
이후 김영삼 정권 말기인 97년 12월 30일 흉악범 23명이 한꺼번에 처형된 것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사형집행은 한 차례도 없었다. DJ정부 시절에는 11명의 사형수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기도 했다. 사형 확정판결 건수 역시 2000년 9명까지 증가했다가 매년 줄어드
문세광(文世光)에게 저격당했다. 이러한 정권의 위기는 결국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을 야기시켰으며,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의 저격으로 급서(急逝)하였다.
저서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민족의 저력》 《민족중흥의 길》 《국가와 혁명과 나》
문세광, 박정희 전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 북한 노동당 부부장 황태성, 위장 귀순간첩 이수근이 처형되었으며, 강력범 고재봉 김대두 박철웅 주영형 등도 이곳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2. 서대문 형무소의 역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 위치한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는 대한 제국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시해사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부인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실려가는 데도 연설을 다 끝마치고 인사까지 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인간미라고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부인이 쓰러진 자리에서 그녀의 신발과 가방을 주워들고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에는 인간적 세세함과 아,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