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기구를 장악하였는데 가령 한민당 계열의 조병옥과 장택상이 각각 경무국장, 수도경찰청장으로 임명되었다.
, 이는 이후 좌우 대결에서 승리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우파는 경찰 기구를 장악함으로서 합법적 폭력기구를 손에 넣었을 뿐만 아니라, 비합법적 폭력기구 또한 조직했다. 자본가,
남한지역 내의 유일한 5․10 단선 거부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아울러 이 단독선거를 추진해 온 미군정에게는 미국의 동북아정책을 거부한 제주도가 눈 속의 가시처럼 매우 거북한 지역이 되고 말았다.
5․10선거가 저지된 직후 군 병력과 함께 응원경찰대도 크게 증강되었다. 미군정은 증
남한 테러의 전초기지로서 제주도를 채택했고, 소련 요원들이 어려움 없이 제주도에 침투하고 있다는 무초의 발언은 아시아에서 반공 보루를 세우려는 미국의 정책과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되더라도 토벌하지 않으면 안 될 대상으로 인식한 것이다.
제주도 현지 미고문
미군정의 통치는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정부가 수립되자 주한미군은 1948년 9월 15일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949년 6월 29일 군사고문단 500명만 잔류시키고 철수를 완료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정부는 국제연합(UN)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군대를
모두 다 서양에서 나온 근대적 정치 체제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한 것은 미국 점령이 남긴 필연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민주주의가 자생적으로 싹트지 않고 바깥에서 이식된 것은 한국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랄 수 없었던 근원적인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