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그는 누 구 인 가
『자화상』 (1941, 제 1시집 “화사집”)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
미당의 시는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림으로써 국민의 보편적 정서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한국 문학계에 커다란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그래서 그는 현대의 시인들 중에서 다른 시인들과 함께 가장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서정주의 작품을 연구해보기 위해 우리는 그의
미당의 영향을 받았다. 고은이 대표적이다. 미당 시의 특징은 바로 우리말을 다루는 그의 천부적인 감각이다. 그의 고향 전라도의 사투리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미당의 시 언어는 민족어의 가능성을 한껏 키운 것으로 평가된다. 현대의 시인들 중에서 만해, 소월, 지용 등과 함께 가장 많은 연구의 대상
연구경향은 서정주의 시와 삶을 유기적인 결합관계에서 파악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당서정주에 대한 논쟁은 문학사적 의미부여라는, 문학사의 중심적 문제와 결합하면서 진행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미당 사후 전개된 일련의 사회적 흐름으로부터 깊은 영향
일본어로 쓴 시 <항공일에> (1943), 단편소설 <최제부의 군속 지망> (1943), 시 <헌시> (1943), <오장 마쓰이 송가> (1944) 등의 친일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친일 작품들은 설사 당대 상황으로서는 대세였다 할지라도 현대에 이르러 서정주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절대 씻을 수 없는 흠집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