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개요
일제시민지통치하 주도세력으로 된 민족민중운동이 제2차대전의 종결로 주어진 일본의 식민지지배종식과 남북분단이라는 정치적 상황 아래서 여기에 민족민중운동이 추구하는 민족적 자주와 민주주의라는 내용을 부여하기 위한 처절한 싸움을 전개한 역사적 시기이다. 토지개학과 적산기
민족운동의 핵심인물이던 이동휘(李東輝)는 군무총장(軍務總長)으로 선출되었다. 정부가 구성되어 교포사회를 직접 통치한 것 같지는 않지만 입법기관인 국민의회는 실제로 구성되어 있어서 뒷날 상해 임시정부와의 통합교섭의 주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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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민족운동과 청년운동
운동으로 인한 쌀 수탈과 소작료 인상,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 전쟁을 위해 조선을 자국의 병참 기지로 만들기 위한 민족 말살 정책이 그것이다. 그 결과 조선 민족에 주어지는 것은 파멸과 몰락이었다.
현진건의 <고향>은 근대적 소유권 확립이라는 미명아래 실시되었던 1910년대 토지조사 사업으로 인
Ⅰ. 민족해방과 해방운동
3·1운동 후의 민족독립운동은 좌우익 운동으로 선명히 분열되었고 우익세력의 일부가 절대독립론으로 이탈해 갔다. 그러나 비타협적 우익세력과 좌익세력은 독립운동 전선에서의 협동전선 내지 연합전선을 이루어서 그 전력을 강화하는 한편 해방 후에 수립할 민족국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