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언론인 조용수와 민족일보
언론인 조용수는 1930년에서 1961년까지 31세의 짧은 인생을 살았다. 경상 남도 함안에서 태어나, 연희대학교 정외과를 중퇴하고 51년 일본으로 밀항하여 재일거류 민단 간부로 활동하였다. 1960년 4.19 후 귀국하여 사회대중당에 입당하여 7.29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1차 자료
1. 창간호 1961년 2월 13일자 조용수 사장은 '<민족일보> 창간에 즈음하여'라는 글을 통해 <민족일보>의 성격을 "국토의 양단, 민족의 사상적 분열, 생활의 돤, 사회악의 창궐을 광정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2. <민족일보> 1961년 4월 24일자 논설 "남북교류 주장에 대한 장총리의 패배주의" /
제2공화국의 언론현황
1960년 3월 부정 선거, 4월 혁명의 주체 중 하나였던 언론
- 4월 혁명 이후 권력의 주체로 부각되기 시작
1960년 7월 1일 ‘군정법령 88호’가 규정한 신문허가제 폐지
- 신문등록제로 전환
- 신문사, 통신사 폭증
신문 권력을 앞세워 취재원에게 공갈 협박하는 기자도
§ 들어가며
한국 현대 언론사에 있어 제3공화국 시기의 언론, 즉 박정희 정권하의 언론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군정기에 한국 언론의 사상적 기초가 완성되었다고 한다면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한국 언론의 형태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중소기업 규모를 벗어나지 못하던 언론은 권력
일보」와 「동아일보」였다. 이 두 신문은 일제에 대한 비판적 논조의 기사를 수록하고 그에 따른 수차례의 정간 및 경고, 몰수 조치 등을 받는 등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민족지로서의 이름을 내걸고 활동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입장은 매우 분분한 의견들이 난무하고 있으며, 연구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