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은 자신의 몸이 쇠약해지는 것을 느끼자 동년 4월 자신의 최측근인 박술희를 불러 친히 쓴 훈요 10조를 주며 “…중략… 후사들이 뜻과 욕심을 방자히 하여 기강을 무너뜨릴까 크게 근심한다. 이에 훈요를 기술하여 뒷세상에 전하니 아침저녁으로 펴보고 길이 거울로 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박술희에게 친수되었다고 전하는 훈요 10조에는 사람마다 불교에 귀의하여 그 가호를 빌고 사원을 보호할 것을 역설하였다. 또 이것을 하나의 불변의 성교의 전거로서 군신이 다 같이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있어 이미 국가사업으로 발전되어 온 민생과 구휼의 여러 제도는 고려시대에도
박술희 등과 모의하여 918년에 궁예를 내쫓고 고려의 주인이 되었지만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 통일전쟁에서 한 발 물러서면서까지 흐트러진 기강과 민심잡기에 노력했다.
그 후에도 왕건은 오랜 라이벌 견훤을 상보(尙父, 왕이 아버지와 같을 정도로 극히 존경하는 신하)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접하고, 경
훈요십조 해석
二十六年夏四月御內殿召大匡朴述希親授訓要曰:
26년 여름 4월 내전에 드시어 대광(大匡) 박술희를 불러 친히 훈요를 주며 말씀하시기를,
“朕聞大舜耕歷山終受堯禪高帝起沛澤遂興漢業.
짐이 듣건대, 대순은 역산에서 밭을 갈다가 마침내 요(堯)의 선위를 받았고, 한나라 고제는 패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