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기생으로 입학했고, 얼마 후 국방경비대 장교로 임관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II. 박정희의 남로당전력
1963년의 대통령 선거때 박정의 대통령후보의 남로당전력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었고, 그의 사상관계는 그 뒤 제대로 검증되지 못했다. 여기서는 박정희의 좌익 경력에 대한 면을 살펴보겠다.
대한 부담감, 1930년대의 암울한 시대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이토록 암울했던 청년 박정희에게 일종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 만주로의 수학여행이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학생들이 어떠한 생각을 했는지는 친구 이성렬(전 김해여중 교장)의 증언에서 드러난다.
만주
박정희 코너’를 설치한 서점도 생겼을 정도라고 하니, 어떻게 보면 그 관심이 오히려 더 많아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최근 그의 딸 박근혜가 선거 유세를 펼치는 과정에서 박정희 향수를 불러일으켜 더욱 그러하기도 하다. 이러한 결과는 그 동안 국내에서 박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증가하
박정희에 대한 관심이 제고 되었었는데 이는 바로 한나라당 대표인 박근혜씨 때문이였다. 언론에서는 박풍(朴風)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그 파급효과는 대단했다. 탄핵이후 급하강했던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대구·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살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박근혜 대표에 대한평가
박정희의 생애- 특히 논란이 끊이지 않는 청년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특히 이러한 그의 행적이 그가 집권한 이후 어떠한 신념체계로 구조화되었는지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박정희의 정치적 행태와 대외정책의 결과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가를 한미관계사례로서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