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전쟁이 끝난 후 후금은 승전국으로서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식량을 내어 줄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명을 정벌할 병선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홍타이지는 내몽고를 정벌하는 한편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을 공격하면서 기세를 떨쳤다. 그리고 조선에 대하여 ‘형제지맹’을 ‘군
인조 14년(1636년),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조선에 대하여 왕자 대신 및 척화 주장자들을 잡아 보내지 않으면 다시 조선을 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이미 척화론이 대세를 이룬 조선 정부는 이를 묵살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명을 정벌하려던 계획을 바
인조반정으로 인해 중립외교를 실시하였던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이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는 쪽으로 실시되었다. 후금에서도 조선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해 왔던 홍타이지가 즉위하며 이괄의 난 때 후금에 투항한 한명윤의 아들과 한윤 그리고 한택, 1619년 부차 전투에서 항복한 강홍
인조이다. 최고 통치자인 국왕이 중립에 서면서 양측의 의견을 적절히 조율하여 외교 정책을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조는 외교정책의 태도에 있어서 변덕스러운 모습을 자주 보인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킨다는 점은 자신의 정통성 문제와도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병자호란 때까지
병자호란하면 떠오르는 것으로 청나라, 친명정책, 인조, 효종, 홍타이치, 남한산성, 후금, 강화도 등 다양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 두 난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으며, 대부분의 답변자들은 이 전쟁들의 결과나 영향에 대해서 잘 모르고, 단편적인 지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