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살펴본 조선의 국방태세와 방어실태에서 임진왜란의 초기에는 조선의 참패만 있었을 뿐이다. 이렇게 전쟁 준비가 거의 없는 가운데 일방적인 침략을 당한 조선의 전란 피해는 더욱 컸다.
2) 일 본
임진왜란이 일어날 시기 일본에서는 풍신수길이 전국시대를 끝내고 전국통일이 이뤄낸 상
의병장, 영웅들의 이야기는 어릴 적부터 누구나 몇 번씩 들어봤을 뿐 아니라, 많은 책으로, 드라마로, 영화로 수없이 제작되어 왔다. 그런데 임진왜란은 패배한 전쟁이 아니었다. 비록 회복이 힘들만큼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침공한 일본군을 몰아낸 승리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병자호란은 조선의
조선의 지방 군사제도는 지역 방어, 진지방어 개념으로 요새에 상주병력(常駐兵力)을 배치해 두었다가 전쟁이 나면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도록 하는 진관제(鎭管制)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진관제는 군정(軍政)의 해이로 상주병력이 유명무실해 졌을 뿐 아니라, 병력이 배치되어 있다하더라고 소규모로
민중이 이에 따라서 각처에서 의병의 봉기가 있었다.
그후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져서 일진일퇴하는 동안에 1599년 풍신수실이 병사하게 되자 일본군은 철수하게 되었다. 이로써 풍신수실의 교만과 탐욕에 의해서 도발되었던 7년간에 걸친 전란이 끝났으며 그것은 조선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3) 최경회 장군과 2차 진주성 전투
- 2차 진주성 전투 직전 조선군의 상황
: 진주성 방어전략에 의한 의견충돌로 인해 성을 비우고 병력을 보존하자는 공성파와 왜군의 호남지역 진출을 막기 위해 진주성을 사수해야 한다는 수성파로 갈림.
●공성파 : 의병장 곽재우와 임태영, 순변사 이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