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 북인 등이 고루 섞여있었고, 지역적으로도 그러하였다. 때문에 실학을 어느 한 학파의 전유물로 파악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러나 초기실학의 발전과정을 선도하였던 그룹은 당쟁에서 밀려 정치권력에 한걸음 물러나있었던 남인계열이었다. 성리학이 주류로 여겨지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남인은
정치 논점 :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이 둔화됨에 따라 각종 수요가 줄어들어 경쟁이 치열해짐. 사교육이 성행하여 강남의 부는 대물림되고 있으며, 그만큼 경제적으로 빈약한 계층은 가난을 대물림.--->조선의 신분제처럼 자신이 속한 계층에서 벗어나기가 힘듦. 이를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책이 사회
북인과 남인으로 분립이 이루어 졌고, 서경덕과 조식의 문인들은 정치적 피화자라는 공동의식을 가졌으며, 후대에 양학파가 결집될 수 있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기축옥사의 피화자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은 허목이 조식과 서경덕의 학풍을 접하는 데에도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정치의 폐해를 지적하고 부정적 당파성을 가진 붕당을 없애기 위하여 송나라 때의 구양수가 《붕당론》을 지은 것처럼 조선 영조 때의 이익(李瀷)은 형 잠(潛)이 당쟁으로 희생된 이유도 있지만, 《붕당론》을 써서 붕당의 큰 폐해를 지적하였다. 종래 조선시대 붕당정치로 인한 당쟁은 조선 중·후기
천거되었을 때 심의겸이 반대하였고,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이 자리에 천거될 때는 김효원이 반대하였다. 이렇게 두 사람의 대립을 둘러싸고 조선시대 최초의 붕당이 형성된 것이다.
그 후 동인은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인해 남인과 북인으로 분리가 되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게 된다.